고니시의 간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 의 서장에 이르기를,
 
“이달 9일에 요시라(要時羅) 가 나와 신을 만나보려 했으나 신이 마침 산성(山城)에 있어 내려가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12일에 신이 직접 그를 만나서 찾아온 사유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 평조신(平調信) 이 들어가 관백을 보고 조선 의 왕자는 데려오기 어렵다는 내용과 대신이 폐백을 올리고 통호(通好)했으면 하는 일들을 말하였더니, 관백이 답하기를 「왕자가 어렵다면 대신의 통호도 무방하다. 」고 하였다.

 

약속을 받아 서울로부터 이틀 노정(路程)을 나왔는데, 가덕도에 머물고 있던 왜장이 조선 의 주사(舟師)가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고 있다고 관백에게 보고하였으며, 청정 이 또 사람을 시켜 치보하기를,

[지금 조선 의 승장(僧將) 송운(松雲) 을 만났더니, 왕자와 대신이 통호하는 일들은 우리 조선 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두 중국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서로 핑계하다가는 10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결단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행장(行長) · 정성(正成) · 조신(調信) 등은 조선 의 뇌물을 받고는 감히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여 동모(同謀)하는 정상이 있으며, 크고 작은 일들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있다. 이번 조신 이 들어간 일도 조선 에서 허락한 것이 아니다. 지난번 나의 계책을 따라 3∼4월 중에 바다를 건너가 경상도 와 전라도 를 몰아쳐 위협했다면 왕자도 데려올 수 있었고 통호하는 서장과 폐백도 결정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행장 등의 불충한 말만을 듣다가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는 시기를 지연하여 시의 적절한 조치를 잃게 되어 도리어 조선 으로 하여금 업신여기고 깔보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으니, 통분함을 누를 길이 없다. 제때에 대병을 출동시켜 호남 지방을 무찔러 조선 이 믿고 있는 지역을 분탕질한다면 조선 에서 화평을 구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행장 등의 죄를 문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관백은 이 서장을 보고서는 크게 노하여 곧바로 사람을 시켜 조신 을 잡아오게 하여 중형을 내리고자 하면서 「지금 청정 의 말을 듣고보니 너희들의 속임수가 이미 드러났다. 용서하기 어렵다. 」 하였는데 조신 은 전날 청정 과 사이가 나빴던 일을 말하여 겨우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가 오사포(五沙浦)에 돌아왔을 때에 관백이 또 사람을 시켜 조신 을 불러 관백이 머물고 있는 은밀한 곳에 들어가 있게 했다 하는데 그후의 일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관백이 도장을 찍은 문서를 보면 이달 5일에 출발하여 4개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했는데 행장 은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게 하기 위하여 선봉으로 정해졌고 청정 은 두번째 부대로 안골포·가덕도· 죽도(竹島) 의 왜병을 이끌고 차례로 진격하기로 했으며, 행장 은 의령(宜寧) 과 진주(晉州) 의 길을 거치기로 하였고 청정 은 경주 와 대구(大邱)의 길을 거쳐 이들 부대가 모두 호남으로 집결하여 전라도 지방을 모두 짓밟고난 다음 다시 화평을 요구하기로 했다 한다.

 

그 명령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지금은 화평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간에 전라도 로 쳐들어가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 새로 파견되는 군사 15만이 6월 초순에 나오면 혹은 진영에 머물고 혹은 뒤를 이어 진격할 것인데, 선봉부대는 오는 1일에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장수들의 의견은 병기와 장비가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출발할 수 없다 하여 7월 보름으로 결정했다.

 

관백의 문서 중에는 또 「지금은 군량을 계속하기 어려우니, 깊숙이 침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전라도 를 분탕질한 뒤에는 곧바로 군사를 되돌려 진강(鎭江) 으로부터 영일(迎日)에 이르는 연해(沿海)에 주둔하고서 조선 에게 화평 조약을 맺을 것인지 안할 것인지를 물으며 우선 말[馬]들을 쉬게 하라. 그리하여 여러 해가 지나 오래되었는데도 조선 이 만일 또 화평을 맺으려 하지 않거든 때때로 나가 조선 의 군대와 백성들이 모여 있고 물자가 부요(富饒)한 지역을 소탕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 나라의 군마는 수고롭지 않고도 조선 의 군민(軍民)이 저절로 소진될 것이다. 이것은 짧은 기간으로 계획하지 말고 내가 죽은 뒤에라도 또 자손들이 있으니, 여러 장수들은 힘을 다해 기필코 조선 이 화평을 애걸한 뒤에야 그만두도록 하라. 」 하고 있다.
 
관백의 생각은 지금 당장에 있지 않으니, 원컨대 이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조치하도록 하라. 내 비록 전쟁터의 진중에 있으나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줄 것이다. 내 말이 참말인지의 여부는 일이 지난 뒤에 징험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번의 전쟁은 진주성을 함락시키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성을 공격해서는 분탕질쳐 함락시키고 꼭 이길 것을 기약하고 있으니, 연로(沿路)의 군읍(郡邑)들은 산성이라 할지라도 아주 험한 지역이 아니면 억지로 진지를 설치하지 말고 길목에 사는 백성과 관아의 재보(財寶)를 모두 옮겨 두어 청야(淸野)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 중국 군사가 이제 이미 크게 이르렀고 우리 나라의 병마도 정돈되어 있다. 일전을 벌여 자웅을 결단할 따름이다.’ 하였더니,

 

요시라 가 답하기를 ‘우리들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관백의 명령이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비록 모두 죽는다 한들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조신 이 만일 나오면 바로 와서 알리겠다.’ 하고는 13일에 그의 본거지로 돌아갔습니다, 평의지(平義智) 로부터 통보된 편지 한 통은 도체찰사에게 보냈습니다.
 
그의 말씨로 보아 정확한 듯하니, 여러 진영에 전령(傳令)을 보내어 변란에 대비해서 검칙(檢飭)하도록 하소서. 요시라 의 말이 극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저들의 실정을 상세히 정탐할 요량으로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신의 부하 전사(戰士)인 송인충(宋仁忠) 을 부산 에 들여보냈고 정승헌(鄭承憲) 을 김해(金海) 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즉시 사실대로 치계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5월 18일]

 

1597년 5월 18일, 김응서의 장계가 조정에 당도합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니시의 심복 요시라가 와서 전하기를, '15만 대군이 전라도를 공격할 것이다. 고니시가 선봉에 서고 가토가 2군을 이끌 것이며, 전라도에서 가능한 많은 식량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살륙할 것이다' 고 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니시가 엄청난 내용을 전하자, 명, 조선측은 고니시에게 격문을 발송합니다.

 

평행장(平行長) 에게 보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흠차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는 풍신행장(豐臣行長) 에게 유고(諭告)하노라. 우리 조정에서는 전에 조선 이 수길 을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고 너도 여러 차례 품게(稟揭)를 병부에 올려 순순히 따르겠다는 말을 아뢰었으므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 수길 을 일본 의 국왕으로 봉하고 너 행장 등에게도 각기 차례대로 작질(爵秩)을 내렸었다. 이러한 큰 은혜와 두터운 덕택은 바로 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는 너희 일본 과 조선 사람들을 다 우리의 적자(赤子)로 생각하여, 피차가 도륙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양측의 분을 풀고 서로가 우호하게 하고자 해서였다. 수길 이 봉함을 받은 뒤에는 이미 신자(臣子)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맹약을 깨뜨리고는 또다시 여러 왜병들을 거느리고 부산 과 기장 등 여러 곳을 점령한 다음 헛소문을 퍼뜨려 서로 공갈하니, 이 일은 크게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불길하니, 지난 가을에 너의 일본 에 지진이 있었던 것은 벌써 그러한 조짐이었다. 이는 아마도 하늘이 군주를 쫓아내고 나라를 찬탈하며 여러 섬의 무고한 대중을 살상하기를 좋아하여 더욱 흉악한 마음을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재앙을 내린 것일 것이다.
 
네가 만일 수길 에게 충성을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중지하도록 말하기를 ‘천조는 의리상 배반할 수 없으며 힘으로도 대적할 수 없다. 조선 은 이미 일마다 대비가 있고 일본 은 사람마다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내란을 방비하여 외침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조속히 군사를 철수하여 남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어린 아들을 위하면 천지 신명께서도 혹 보살펴 주시어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의 충성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거짓으로 청정 과 사이가 나쁜 것처럼 하나, 실상은 속으로 서로 도와 조선 을 도모하려고 밖에서 전쟁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서 가정을 버리고 어버이를 떠나게 하여 번뇌와 노고가 몇 년 동안 풀리지 않게 하고 있다. 너는 보본(報本)의 헛됨과 장옥(墻屋)의 화를 생각하지 않느냐?
 
너는 어찌 60여 세의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며 충성스럽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수길 과 단지 7∼8세의 젖내나는 한 아이을 진심으로 너의 군주로 생각하여, 정성을 다해 떠받들며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달게 여겨 사양하지 않느냐. 아니면 너는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환란을 두려워하고 몸을 보존해서 틈을 타 일을 성취해서 찬시(簒弑)의 역적을 토벌하고 66개 섬의 인심을 수습하여 네 산성(山城)의 옛 군주를 복위하여 다시 천하의 큰 충신이 되고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냐.
 
만일 산성군 을 바로 세울 수 없다면, 대장부가 어찌 스스로 중국 과 결탁하여 왕에 봉해짐을 취하려 하지 않고 거의 죽어가는 노추(老酋) 수길 한 사람을 받들려 하느냐. 노추가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너희들이 장차 어린 아들에게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너의 종족과 청정 의 집안을 멸망시켜 후일의 근심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네가 그때에는 별다른 꾀를 내려고 한들 또한 늦지 않겠느냐.
 
지금 조선 에서 달려와 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진노하여 남병(南兵)과 북병(北兵)이 곧바로 짓쳐 함께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유격 장군 심유경 이 너와 교분이 두텁고 또 여러 차례 말하기를, 네가 원래 나쁜 마음이 없으니 처분을 따를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본원에서는 병마를 이끌고 근경(近境)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 전진하지 않고 우선 너희들에게 순천(順天)과 역천(逆天)의 의리와 이해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저 청정 으로 말하면 하나의 무식한 무인(武人)일 뿐이다. 너의 부하 중에 그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천금을 내릴 것이고, 너의 일본 의 국왕에 봉해줄 것이다. 너는 잘 도모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7년 5월 25일]

 

보시다시피 아직도 명과 조선측은 고니시를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 라고 여긴 것이죠. 그래서 고니시에게 "가토의 목을 베어라" 라고 요구하고 있네요. 이에 대한 고니시의 반응은 너무나 교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행장(行長) 의 품첩(稟帖)은 다음과 같다.
 
“천조(天朝)의 유격(遊擊) 심 노야(沈老爺) 대전(臺前)에 품합니다. 듣건대 조선 병마(朝鮮兵馬) 김 방어사(金防禦使)가 산성을 쌓고 의령(宜寧) 을 사수한다고 합니다. 대개 방어사와는 4∼5년 동안 서로 정을 나누며 함께 강화에 대한 일을 논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왕(日本國王)과 여러 대신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어사가 의령 을 굳게 지키며 자웅(雌雄)을 겨루려 한다고 합니다. 대저 의령 은 전라도 의 요로(要路)이므로 일본 군병들이 힘을 합쳐 성에 오르면 방어사는 반드시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전사할 것이니, 매우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노야께서는 이런 이치로 분명하게 조선 국왕 에게 말씀드려 다른 장수로 하여금 의령 을 수성하게 하고 방어사는 노야의 막하(幕下)에 함께 있으면서 장래 화목하게 할 일을 도울 수 있게 해주소서. 방어사가 절사(節死)한 후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화의를 논하게 하면 반드시 세월이 지연될 것입니다. 원컨대 노야께서는 힘써 주십시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대사(大事)를 성사시켜 평소의 고생을 풀어야 합니다. 오직 잘 살피십시오. 정유년 5월 26일 풍신행장(豐臣行長) 드림.”
 
[선조실록 1597년 6월 9일] 

 

아주 교활하지 않습니까? 마치 조선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써갈겼군요. 이렇게 해서 상대방이 자신을 더욱 믿도록 만든 고니시....그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도원수 권율(權慄) 의 비밀 장계가 왔다. 【그 대략은 행장(行長) 이 김응서(金應瑞) 에게 보낸 글 1통을 올려보낸 일이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 병마(朝鮮兵馬) 김 방어사(金防禦使) 족하에게 품한다. 일본 에서 평조신(平調信) 이 돌아왔기 때문에 즉시 요시라(要時羅) 를 시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 족하에게 알려주도록 했다. 또 머지 않은 앞날에 일본 군병이 바다를 건너 유둔(留屯)할 것이어서 밤낮으로 마음이 아프나,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잘 살피도록 하라. 정유년 6월 3일 풍신행장(豐臣行長) 씀.’】

 

[선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가 치계하기를,

(중략)

"요시라 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10월 그믐께면 연해(沿海)의 진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후에도 강화할 단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행장 의 말이나 내 말이 일을 겪고나면 징험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싸울 기약이 정해졌으니 출입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나 대병(大兵)이 바다를 건너오면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나와 알려줄 계획이며, 비록 진중에 있더라도 저들의 정상을 통고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도 깊숙이 들어가고나면 병사(兵使)가 먼 경상도 에 있게 되어 통고할 길이 없게 되니, 이것이 염려된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종식시킬 방책을 강구하고 싶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백만 군사를 내보내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병기(兵器)가 훌륭히 갖춰져 있고 사졸(士卒)도 용맹스러우며 성곽도 견고하고 중국 군사가 대거 이르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짓밟아 버릴 수 있다.’ 하였더니,

 

답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겠다고 핑계대고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 조선 의 수군은 이미 정돈되었는가? 지금쯤은 출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

(후략)

[선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고니시의 간교함이 구구절절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복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가서 친절하게 자기들의 계획을 알려준뒤, "우리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라며 운을 잡고는 "수군이 출전하는 게 좋곗다"라며 수군 출전을 촉구하네요.

 

여기에 낚인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출전을 명하게 되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계의 달인입니다.

by 역사짱 | 2009/08/21 00:17 | 트랙백 | 덧글(1)

이순신은 부산에 출정했었다

 학계에서는, 이순신이 정유년에 한산도에서 부산으로 출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순신은 끝까지 출정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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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중략)

"이순신(李舜臣) 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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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자를 보면, 이순신은 이때 출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윤두수가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듣지 않고 한산도에서 지키고만 있었다며 공격한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정탁 등이 동의했고, 왕도 이 의견을 수용했다. 그런데, 뜻밖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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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이순신 이 치계하기를,
 
“ 중국 의 사신이 이미 통신(通信)하며 왕래하였는데도 흉적(兇賊)이 그대로 변경에 있으면서 아직도 틈을 노리어 침략할 계책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분개스럽습니다.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진주(進駐)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하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指揮)할 일이 있거든 급히 회유(回諭)를 내려주소서.”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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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을 보충하는 성격을 띈다. 따라서, 한 날짜에 여러 기록을 뭉뚱그려 넣기 일쑤였다. 따라서, 저 기록은 1597년 1월 1일에 보내온 것이 아니라, 1월의 어느날 이순신이 보내온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순신이 부산으로 진주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결전을 치루겠다는 내용의 치게를 올렸다고 나와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윤두수는 분명 이순신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고 공격했는데, 여기서는 이순신이 가토를 잡겠다고 하지 않는가?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측이 편찬한 기록이니, 어떻게 보면 서인측의 조작일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련지 모른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의미심장한 권율의 장계가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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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이 치계(馳啓)하기를,
 
“ 부산포(釜山浦) 의 정탐 아병(牙兵) 이수경(李守京) 의 보고에 의하면 ‘이달 10일 진시(辰時)에 우병사(右兵使)·통제사(統制使)·우수사(右水使)및 각진의 여러 장수들이 우리 나라 배 2백여 척으로 다대포(多大浦) 를 건너가 머물렀다. 우병사가 송충인(宋忠仁) ·두모악(豆毛岳)· 김아동(金牙同) 등을 부산포 왜장 평행장(平行長) 에게 보내 밀약을 했다. 전일 모의하기를 「 청정(淸正) 을 부산 으로 유인해 저들과 우리가 동시에 참살하고, 요행히 오지 않는다면 행장 이 청정 의 처소에 나가서 서로 이야기할 때 우리 나라가 마음을 합쳐 업습하여 죽인다. 배들은 부산 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초량항(草梁項) 에 모여 대총통(大銃筒) 한 발을 방포한 뒤에 그대로 그곳에 머물기로 한다. 」 하였다. 이를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배 안에서 비밀히 약속한 사실을 정탐인이 참여하여 들은 것도 아닐텐데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분명히 보고서가 황당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우므로 그 보고해온 바에 따라 아룁니다. 좌도의 수군이 점차 전진하여 우도 수군과 합세하는 일은 수사(水使) 이운룡(李雲龍) 에게 이미 전령을 보냈습니다. 좌도의 병사(兵使)·방어사(防禦使) 등이 약간의 정예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경주(慶州) · 울산(蔚山) 경계에 진주(進駐)시켜 뜻밖의 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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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이 보고한 장계에는 이수성의 보고가 실려있었다. 이수성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월 10일 진시에 우병사 김응서, 통제사 이순신, 우수사 배설 및 각진의 여러 장수들이 2백여척을 이끌고 다대포를 건너가 머물렀다.

2. 김응서는 송충인, 두모악, 김아동 등을 고니시에게 보내 밀약을 했다. 그 밀약의 내용은 "가토를 부산으로 유인하여 고니시와 조선군이 동시에 공격하여 참살하자. 만약 오지 않으면 고니시가 가토와 만나서, 우리군으로 하여금 엄습하여 죽이게 하자. 수군은 부산에서 서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초량항에 모여 머물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권율은 "배 안에서 비밀히 약속한 사실을 정탐인이 참여하여 들은 것도 아닐 텐데, 이와 같이 보고했으니 분명히 보고서가 황당하다" 라고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일단은 당장 아니라고 할 수도 없기에 보고를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권율은 좌우도 수군이 서로 합세하게 하도록 수사 이운룡에게 명령을 내렸고, 육군도 병사, 방어사가 각기 정예병을 선발하여 경주, 울산에 배치시켜 적의 습격에 대비하게 했다고 보고했다.

이를 본다면, 이순신은 분명 이때 출전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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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이 치계하기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 의 치보(馳報)에 ‘10일은 일기가 온화했다. 저와 통제사(統制使)·경상 우수사가 일시에 전선(戰船) 63척을 거느리고 해뜰 무렵에 장문포(長門浦) 에서 배를 띄워 미시(未時)에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니 왜적 이 창황히 수선떨며 병력 3백여 명을 내어 저항하려고 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에 수군(水軍)이 절영도(絶影島) 로 후퇴하여 정박하자 왜적들도 저희들 진으로 도로 들어갔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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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2월 10일, 조선군은 작전을 개시한다. 이순신, 배설, 김응서는 전선 63척을 거느리고 해뜰 무렵, 장문포에서 배를 띄워 부산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에 일본군은 혼란에 빠진 채 3백여명으로 저항하려 했다. 이때 교전은 없었고 다만 바다위에서 시위를 한 모양이다. 날이 저물 무렵, 수군은 절영도로 배를 옮겨 정박했다. 이에 일본군도 진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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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둡자 요시라(要時羅) 가 배를 타고 나와서 행장(行長) 의 뜻으로 말하기를 「즉시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의 말이 있을까 두려워서 즉시 사람을 보내지 못했다. 」 하고, 또 행장 의 말을 비밀히 전하기를 「내가 미리 여러 진의 왜장들에게 허세를 부려 말하기를 『 조선 은 지금 오랫동안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용병술(用兵術)에 익숙해 있고 많은 전함(戰艦)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길는지는 알 수 없다. 청정(淸正) 이 바다를 건너온 뒤에 잠시 그 군사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이로 인하여 분노하였다. 이달 8·9·10일 간에는 수군이 기필코 부산 앞바다에 나가 정박하고 양도(糧道)를 끊으려 할텐데 이후 우리들의 형세가 낭패할 것이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또 들으니 수군의 숫자가 거의 1천여 척에 이른다고 한다. 각진에서는 십분 자세히 살펴서 관하의 왜인 을 단속, 제멋대로 행동하여 조선 의 노여움을 도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 수군을 보니 그 숫자가 매우 적고 보기에 엄숙하지도 못하여 내가 퍼뜨린 말이 결국 거짓으로 돌아가 내심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지금 이 계책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니다. 청정 이 처음 관백(關白)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에 결연히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이미 일본 에게 죽임을 당해 남은 병졸이 거의 없으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간다면 어찌 왕자(王子) 만 와서 사죄하겠는가. 땅 역시 점령해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니 나의 조처가 어찌 행장 과 같겠는가. 』 하였다. 관백이 청정 의 말을 믿고 드디어 약속을 어겼으니 매우 통분하다. 하루 이틀 안에 전함을 더 모아 성대한 위세를 보인다면 정성(正成) 등이 청정 을 책하기를 『네가 조선 을 재차 침범하는 문제에 대해 관백 앞에서 큰소리를 치고 왔으니 스스로 책임지고서 속히 격퇴하라. 』고 한다면 그는 싸우려고 바다로 내려올 것이니, 이때에 덮쳐 공격함이 무방할 것이다. 그후부터는 일본인들이 조선 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니, 이번의 거사를 심상하게 여기지 말라. 」 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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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이 절영도로 정박한 그날 밤, 요시라가 몰래 찾아왔다. 그는 고니시의 뜻을 받들어 온 것이었다. 요시라를 통해 전해진 고니시의 조언은 다음과 같았다.

1. 나는 왜장들에게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을 해와서 용병술에 익숙해져 있고 많은 전선을 가지고 있으니 이긴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계다가 가토가 바다를 건너온 뒤에 사람들을 죽여대서 조선인들이 분노해하고 있다. 그리고 2월 9,10,11일 중에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할 것이라고 한다. 그 숫자는 1천여척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조선을 도발하지 마라!" 라고 말했었다.

2. 그런데 지금 조선 수군이 겨우 63척만 이끌고 왔으니 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3. 가토는 도요토미 앞에서 "조선 사람들은 이미 많이 죽어 남은 병졸이 거의 없으니, 다시 친다면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어찌 고니시와 같곘습니까?" 라고 했다. 이때문에 도요토미가 전쟁을 다시 일으킨 것이다. 매우 통분하다.

4. 하루 이틀 안에 전함을 더 모아 성대한 위세를 갖추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정성(누구지...)이 가토에게 "네가 큰소리를 치고 왔으니 스스로 책임지고 저들을 격퇴하라!" 고 한다면 필경 가토는 싸우려고 바다로 내려올 것이다. 이때 그를 치라!

고니시의 의중을 알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정말로 가토를 조선 수군이 제거하길 바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것은 그의 교활한 책략의 한부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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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하기를 「병사(兵使)께서 4∼5일 동안 머무신다면 행장 ·정성 등이 한 번 나아가 뵐 것이라고 했으니 요시라 도 그때 정성 과 행장 을 따라올 것이다. 」 하고 심 유격(沈遊擊) 의 친서 유첩(諭帖)을 돌려 보였다. 
 
<선조실록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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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라는 김응서에게 4~5일 동안 머무라고 제안했다. 그러면 고니시 등이 뵙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유경의 유첩을 보이기도 하며 신뢰를 쌓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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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먼 도의 수군이 당시 일제히 도착하지 않아 모일 기약이 없고 형세도 미치지 못했는데 외로운 군사로 적이 있는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실로 좋은 계책이 아니었다. 비록 청정 을 유인해낸다고 하더라도 근일 바람이 불순하고, 서생포(西生浦)앞바다는 동해 에 접해 있어 파도가 아주 험한데 외로운 배가 돌아와 정박하기는 형세상 어려울 것이므로 수군이 다 모인 뒤에 도모하려고 통제사와 같이 의논하여 12일에 배를 돌렸다. 가덕도(加德島) 동쪽 바다에 도착하여 정박했는데 왜적 이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초동(樵童) 1명을 쳐서 죽이고 5명을 잡아갔다. 통제사가 저에게 말하기를 「가덕도의 왜적 이 우리 초동을 죽였으니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하였는데, 저의 생각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배를 전진시키자 적들은 스스로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험한 곳에 웅거하여 방포(放砲)하였다.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 가 타고 있는 배를 몰아, 제가 거느리고 있던 항왜(降倭) 17명을 옮겨 태워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대포를 무수히 발사하자 왜적 10여 명이 보이는 곳에서 곧장 거꾸러져 죽었으며 우수 역시 왜적 1명을 사살하고 날이 저물 때에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돌아와 변을 대비하였다. 

 <선조실록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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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선수군은 모두 결집하지 않은 모양이다. 김응서, 이순신, 배설이 끌고 온 63척만 당시 절영도에 정박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통제사 이순신이 압력에 못 이겨 전선을 모두 결집하지 않은 채 한산도에 정박한 전선들만으로 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은 전선으로 요시라의 말대로 오래 머무는 것은 좋은 계책이라고 보여지지 않았다. 설령 가토가 나온다 해도 바람의 방향도 좋지 않고 파도도 험해서 계속 정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엇다. 그래서, 일단 수군이 다 모인 뒤에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2월 12일, 퇴각하여 가덕도에 정박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작스런 상황이 발생한다. 일본군이 비밀리에 엿보고 있다가 급습하여 초동 1명을 죽이고 5명을 잡아간 것이다. 이에 격노한 이순신은 김응서에게 "이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고, 김응서도 이에 동의했다. 조선수군은 다시 전진했다. 이에 일본군은 정면대결을 꺼리고 험한 곳에 웅거하며 방포했다.

이에, 안골포 만호 우수가 타고 있는 배를 몰아, 김응서가 거느리고 있던 항왜 17명을 옮겨 태워 적진 앞으로 돌진하여 대포를 무수히 발사했다. 그 결과 일본군 10여명이 순식간에 전사했다. 또한 우수는 직접 왜적 1명을 사살했다.

날이 저물자, 조선수군은 영등포 앞바다에 돌아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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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14일 미시(未時)에 요시라(要時羅) 가 안골포 로부터 배를 타고 진친 곳까지 와서 말하기를 「오늘 청정(淸正) 과 죽도(竹島) · 안골포 의 왜장 및 행장 · 정성(正成) 등이 안골포 에 모여 서로 의논하였다. 『조선 수군들이 이같이 횡행하니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하고 공격할 수 없을 경우에는 치지 말자. 』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 중국 조정의 명령이 되돌아 올 때까지 충돌하지 말 것으로 맹약문(盟約文)에 서명하여 관백에게 입송(入送)하고 명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자는 참하자. 』 하였다. 이에 다른 나머지 장수들이 서명하기를 『 중국 조정의 회답이 올 때까지 거제(巨濟) · 칠원(漆原) · 창원(昌原) · 진해(鎭海) · 함안(咸安) · 진주(晉州) · 고성(固城) · 사천(泗川) 경계를 범하지 말기로 맹약한다. 이후부터 혹 사냥한다고 하면서 무고하게 깊이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도 무방하다. 』고 했다. 청정 은 처음에는 서명을 하지 않고 묻기를 『 조선 의 전선(戰船)은 배 한 척에 몇 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가?』 하니, 정성(正成) 등이 『내가 출입하는 자들로부터 상세히 들었는데, 배 한 척에 실을 수 있는 인원은 노군(櫓軍) 1백 50명, 사수(射手) 1백명, 화포군(火砲軍) 60명이라고 한다. 』 하자, 청정 이 『그렇다면 가볍게 침범할 수 없겠다. 』 하면서 즉시 서명했다. 그러니 이후부터 중국 조정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충돌할 리가 만무하다. 조선 역시 병력이 있으니 이번에 수군이 진격할 능력이 어찌 없겠는가. 가덕도(加德島)의 왜장 역시 행장 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제 상호간에 교전이 있을 때 군관(軍官) 6명과 졸왜(卒倭) 8명이 탄환을 맞아 즉사하고, 총알을 맞았으나 죽지 않은 자 17명이 지금 고통을 받으며 누워 있는데 생사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애통하고 참혹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고 하자, 정성 과 행장 등이 답하기를 『이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불러온 화이다. 무엇 때문에 먼저 침범하여 노여움을 촉발했는가? 잡아온 조선인을 속히 돌려보내라. 』고 하니, 즉시 보내 준다고 하였다. 」 라고 했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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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미시에 요시라가 찾아와서 일본군 상황을 전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니시, 가토 등 일본 장수들이 안골포에 모여서 "조선수군이 저렇게 횡횡하니, 일단 중국 조정에서 사신이 올 때까지 일단 수군과 교전하지 말자" 라고 합의를 봤다. 그리고 아예 경계를 넘지 말자는 내용의 서명을 한다.

2. 가토는 이에 처음에는 서명을 하지 않고 조선군 측의 전선의 인원 수를 묻더니, 이내 수긍하며 서명했다.

3. 이렇게 일본군 측이 싸우지 않기로 했으니 충돌할 리가 없다. 또한 조선군은 병력이 있으니 어찌 진격할 능력이 없겠는가?

4. 가덕도의 왜장이 행장에게 와서 피해를 보고하고(군관 6명과 일본병 8명 전사, 17명 부상) 애통함을 호소하자, 고니시가 그를 꾸짖고 조선인을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이게 사실일까?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일본군 장수들은 조선수군과 정면대결을 꺼리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다. 이 움직임을 고니시가 열성적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고니시는 가토를 조선수군과 함께 협공하여 참살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가토가 출정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조선수군으로 하여금 진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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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처소에서 요시라(要時羅) 가 다시 들어올 때 데리고 오도록 깨우치자, 마땅히 데리고 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또 비밀히 말하기를 「지금 청정 이 죽도(竹島) · 안골포(安骨浦) ·가덕도의 왜장들과 함께 모의하기를 『3월 초승에 호남과 영남 두 도를 먼저 공격한다면 조선 이 왕자를 입송(入送)하는 것도 반드시 꺼리지 않을 것인데 이 계책이 어떤가?』 하니, 여러 왜장들은 모두들 찬성했으나 정성 ·행장 등만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백방으로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정지시킬 계책이 없다. 병사께서 행장 에게 서장(書狀)을 쓰고 서명 날인하여 보낸다면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보이고 관백(關白)에게 들여보내 그 계책을 방지하려 한다. 」하기에, 「어떤 내용으로 서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하고 대답했더니, 그는 답하기를 「서장은 『이번에 배를 거느리고 여기 온 것은 특별히 다른 생각은 없다. 일찍이 중국 사신이 회정(回程)할 때에 관백의 서계(書契)를 보니, 천조가 조처할 때까지는 전쟁을 조금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러 일본군 진영의 낙오된 군사들이 자주 내지에 들어가서 혹 마을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고 혹은 인민을 살해하기도 하는 등 침범이 무상하다. 이는 곧 여러 왜장들의 명령으로 관백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니 지극히 놀랍다. 중국 조정의 조처하는 회답이 있기까지는 이같이 소란하게 하는 일은 금지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때문에 배를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러 연유를 묻는 것일 뿐이다. 』 라는 내용으로 하라. 」하였다. 이렇게 서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저들을 붙들어 매어두는 데 관계가 있으므로 그의 원에 따라 만들어 주었다.

<선조실록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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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찾아뵌 요시라는 이순신 앞에서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겠노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말한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햇다.

1. 가토 기요마사는 지금 죽도, 안골포, 가덕도의 일본 장수들과 함께 3월 초순에 호남과 영남 두 도를 먼저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여러 왜장들은 모두들 찬성했다. 단지 고니시 등이 이는 불가하다고 했다. 이러니 정지시킬 방법이 없다.

2. 김응서가 고니시에게 서장을 써 보낸다면, 그 서장을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보일 것이다. 그리고 도요토미에게 들여보내 가토의 계략을 막겠다.

이에 이순신이 어떤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자, 요시라는 "조선 수군이 출동해 온 것은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도요토미의 서계에는 명의 특별한 조치가 있을 때까지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러 일본군 진영의 낙오된 자들이 자주 마을에 들어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백성을 살해한다. 이는 일본군 장수들이 도요토미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니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중국 조정에서 회답이 있기 전에는 이같은 일을 금지하는 게 어떻곘는가? 이 때문에 배를 끌고 연유를 묻는 것 뿐이다." 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에, 김응서는 서장을 만들어준다.

도요토미의 서계는 거짓말이다. 도요토미는 이미 재침략을 선언한 바 있었고, 일본 장수들은 그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런데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서계라니? 이는 말장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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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전선의 수가 단약(單弱)하여 서생포(西生浦)로 진격하여 정박할 수도 없고, 이미 청정 이 출전할 의도도 없으니 여기 있더라도 아무 유익함이 없을 것이므로 15∼16일에 진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지나온 왜진을 탐문했더니 성터는 고치고 모든 장비는 전일의 배나 되어 나아가 치기가 어렵다. 부산(釜山) 에는 왜적 의 무리가 7천여 명이나 되고, 가옥의 숫자는 1천여 좌(座)이며 배의 척 수는 대소선을 합하여 모두 70여 척이다. 안골포(安骨浦) 의 왜적 수는 1천여 명, 가옥 수는 2백여좌, 선척 수는 40여 척이고, 가덕도(加德島)는 왜적 수가 5백여 명, 가옥 수는 1백여 조, 선척 수는 20여 척이었으며, 죽도(竹島) 는 강의 어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조사해 볼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수군 장수들의 보고는 지금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번의 보고와 육지 정탐인(偵探人)들의 보고 사연과 크게 다르니 매우 해괴합니다. 만호(萬戶)가 탔던 배의 실화(失火) 연유 및 2척의 사후선(伺候船)을 빼앗기고 사람들이 잡혀간 사실 등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아마 숨기는 듯싶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자세히 기록하여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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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서, 이순신 등은 전선의 수가 부족하여 서생포로 진격하여 정박할 수도 없고, 가토는 출전할 의도도 없으니,  계속 머무는 것은 아무 유익함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15~16일에 진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또한 왜진을 탐문한 결과, 함부로 치기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군이 7천여명이 있었고, 전선은 대소선을 합하여 모두 70여척이었다. 또, 안골포의 일본군 수는 1천여명, 전선 수는 40여척이었고, 가덕도에는 일본군 5백여명, 전선 20여 척이 있었다. 조선수군이 지금 이끌고 온 63척만으로는 도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철군한 것이다.

이러한 장계의 내용에 대해 권율은 의문을 표시했다. 일단, 김응서의 장계 외에는 수군 장수들의 보고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또한, 김응서의 보고와 육지 정탐인들의 보고가 크게 달랐다. 예를 들어, 만호가 탓던 배의 실화 여부와 2척의 사후선을 빼앗겨 사람들이 잡혀간 사실 등은 정탐인들의 보고에 있었으나 김응서의 장계에는 없었다.

이러한 권율의 보고에 대해 선조는 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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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기로 이르기를,
 
“지금 도체찰사의 서장(書狀)을 보니 이번의 조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국가의 성패가 이번 거사에 결판이 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체찰사가 막연히 모르고 있었다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설사 십분 의심의 여지도 없어 성공이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체통으로 보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원수(都元帥)를 추고(推考)하여 힐책할 것인지를 의논해서 조처하도록 비변사(備邊司)에 말하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비밀히 회계하기를,
 
“ 이원익(李元翼) 이 이미 체찰사의 명을 받고 4도(四道)의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원수 이하가 모두 절제(節制)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권율(權慄) 은 대소 군무(軍務)를 모두 품의하여 명령을 받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군과 육군을 아울러 거병(擧兵)하는 실로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일에 대해 막연하게 가부를 품의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체찰사가 만나보고 일을 의논하려고 세 차례나 전령했으나 나아가지도 않았으니 극히 부당합니다. 도원수는 비록 상급자가 없는 장수이기는 하지만 절제하는 권한을 이미 도체찰사에게 위임했는데 권율 이 어찌 전혀 품의하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엄중히 논핵해야 마땅합니다. 다만 이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를 당해서는 가벼이 처리할 수 없으니 힐책하는 하서를 내려 그의 잘못을 알도록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도체찰사는 이 때문에 자책하여 사직을 청하기까지 하는데 잘못한 것은 오로지 권율 에게 있으니 이것을 혐의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관(史官)을 보내 회유(回諭)하소서. 또 거듭 군율(軍律)을 엄히 하도록 제장(諸將)을 경계함으로써 지금부터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는 한결같이 군법에 따른다는 뜻을 하유(下諭)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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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권율이 막연히 모른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하여 비변사에 도원수를 추국할 지 여부를 묻는다. 이에 대해 비변사는 "이번에 수군과 육군으로 하여금 거병하는 일은 중대한 일인데, 가부를 결정하지도 않고 체찰사가 세차례나 불렀으나 가지 않았으니 부당한 일입니다" 며 "실로 엄중히 논핵해야 마땅합니다" 라고 권율의 책임이 크다고 답변한다. 하지만 일단은 벌은 내리지 말고, 힐책하는 내용의 전교를 내리는 선에서 끝내도록 하자고 제의한다.

그런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의중은 도대체 무엇일까? 일찍이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당장 출격하여 바닷길을 막자고 했던 고니시다. 그는 조선 수군이 오지 않은 채 가토가 상륙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조선 사신에게 함으로써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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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위무사(慶尙道慰撫使) 황신(黃愼) 이 장계에,
 (중략)
평행장(平行長) 이 송충인(宋忠仁) 을 불러 말하기를 「 조선 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나 이 뒤에도 할 일이 있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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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순신이 김응서 등과 함께 출정해오자, 이번에는 가토를 바다로 끌어내어 섬멸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가토가 움직이지 않도록 함부로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지 말자는 서명을 하도록 제의하고, 관철시킨다. 그리고는 조선 수군이 진격하라고 조언하는 가 하면, 가토가 전라도, 경상도를 치려 한다고 알려주기까지 한다.

고니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by 역사짱 | 2009/08/18 21:29 | 역사 | 트랙백 | 덧글(0)

역사짱의 이글루에 오신 여러분께!

1. 본인은 역겔에서 좀 활동했던 유저였으나, 요즘 막장화 되어가는 꼴이 보기 싫어서 네이버 카페를 전전하다가 이글루스에 처음 가입했습니다. 초짜에게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2. 본인은 중도를 지향합니다. 왜 중도냐 하면... 극우, 극좌 들이 하는 행태가 맘에 들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러한 성향을 가지신 분들이시라면 뒤로가기를 가볍게 눌러주시길...

3. 참고로 제 닉넴은 허세입니다.^^;;;

by 역사짱 | 2009/08/18 21:2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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