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21일
고니시의 간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 의 서장에 이르기를,
“이달 9일에 요시라(要時羅) 가 나와 신을 만나보려 했으나 신이 마침 산성(山城)에 있어 내려가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12일에 신이 직접 그를 만나서 찾아온 사유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 평조신(平調信) 이 들어가 관백을 보고 조선 의 왕자는 데려오기 어렵다는 내용과 대신이 폐백을 올리고 통호(通好)했으면 하는 일들을 말하였더니, 관백이 답하기를 「왕자가 어렵다면 대신의 통호도 무방하다. 」고 하였다.
약속을 받아 서울로부터 이틀 노정(路程)을 나왔는데, 가덕도에 머물고 있던 왜장이 조선 의 주사(舟師)가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고 있다고 관백에게 보고하였으며, 청정 이 또 사람을 시켜 치보하기를,
[지금 조선 의 승장(僧將) 송운(松雲) 을 만났더니, 왕자와 대신이 통호하는 일들은 우리 조선 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두 중국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서로 핑계하다가는 10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결단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행장(行長) · 정성(正成) · 조신(調信) 등은 조선 의 뇌물을 받고는 감히 은혜를 저버리지 못하여 동모(同謀)하는 정상이 있으며, 크고 작은 일들을 사실대로 아뢰지 않고 있다. 이번 조신 이 들어간 일도 조선 에서 허락한 것이 아니다. 지난번 나의 계책을 따라 3∼4월 중에 바다를 건너가 경상도 와 전라도 를 몰아쳐 위협했다면 왕자도 데려올 수 있었고 통호하는 서장과 폐백도 결정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행장 등의 불충한 말만을 듣다가 군사가 바다를 건너가는 시기를 지연하여 시의 적절한 조치를 잃게 되어 도리어 조선 으로 하여금 업신여기고 깔보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으니, 통분함을 누를 길이 없다. 제때에 대병을 출동시켜 호남 지방을 무찔러 조선 이 믿고 있는 지역을 분탕질한다면 조선 에서 화평을 구걸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행장 등의 죄를 문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관백은 이 서장을 보고서는 크게 노하여 곧바로 사람을 시켜 조신 을 잡아오게 하여 중형을 내리고자 하면서 「지금 청정 의 말을 듣고보니 너희들의 속임수가 이미 드러났다. 용서하기 어렵다. 」 하였는데 조신 은 전날 청정 과 사이가 나빴던 일을 말하여 겨우 형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가 오사포(五沙浦)에 돌아왔을 때에 관백이 또 사람을 시켜 조신 을 불러 관백이 머물고 있는 은밀한 곳에 들어가 있게 했다 하는데 그후의 일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체로 관백이 도장을 찍은 문서를 보면 이달 5일에 출발하여 4개 부대로 나누어 장수를 정했는데 행장 은 공을 세워 속죄(贖罪)하게 하기 위하여 선봉으로 정해졌고 청정 은 두번째 부대로 안골포·가덕도· 죽도(竹島) 의 왜병을 이끌고 차례로 진격하기로 했으며, 행장 은 의령(宜寧) 과 진주(晉州) 의 길을 거치기로 하였고 청정 은 경주 와 대구(大邱)의 길을 거쳐 이들 부대가 모두 호남으로 집결하여 전라도 지방을 모두 짓밟고난 다음 다시 화평을 요구하기로 했다 한다.
그 명령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지금은 화평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간에 전라도 로 쳐들어가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 새로 파견되는 군사 15만이 6월 초순에 나오면 혹은 진영에 머물고 혹은 뒤를 이어 진격할 것인데, 선봉부대는 오는 1일에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장수들의 의견은 병기와 장비가 준비되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출발할 수 없다 하여 7월 보름으로 결정했다.
관백의 문서 중에는 또 「지금은 군량을 계속하기 어려우니, 깊숙이 침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전라도 를 분탕질한 뒤에는 곧바로 군사를 되돌려 진강(鎭江) 으로부터 영일(迎日)에 이르는 연해(沿海)에 주둔하고서 조선 에게 화평 조약을 맺을 것인지 안할 것인지를 물으며 우선 말[馬]들을 쉬게 하라. 그리하여 여러 해가 지나 오래되었는데도 조선 이 만일 또 화평을 맺으려 하지 않거든 때때로 나가 조선 의 군대와 백성들이 모여 있고 물자가 부요(富饒)한 지역을 소탕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 나라의 군마는 수고롭지 않고도 조선 의 군민(軍民)이 저절로 소진될 것이다. 이것은 짧은 기간으로 계획하지 말고 내가 죽은 뒤에라도 또 자손들이 있으니, 여러 장수들은 힘을 다해 기필코 조선 이 화평을 애걸한 뒤에야 그만두도록 하라. 」 하고 있다.
관백의 생각은 지금 당장에 있지 않으니, 원컨대 이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조치하도록 하라. 내 비록 전쟁터의 진중에 있으나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줄 것이다. 내 말이 참말인지의 여부는 일이 지난 뒤에 징험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번의 전쟁은 진주성을 함락시키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성을 공격해서는 분탕질쳐 함락시키고 꼭 이길 것을 기약하고 있으니, 연로(沿路)의 군읍(郡邑)들은 산성이라 할지라도 아주 험한 지역이 아니면 억지로 진지를 설치하지 말고 길목에 사는 백성과 관아의 재보(財寶)를 모두 옮겨 두어 청야(淸野)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 중국 군사가 이제 이미 크게 이르렀고 우리 나라의 병마도 정돈되어 있다. 일전을 벌여 자웅을 결단할 따름이다.’ 하였더니,
요시라 가 답하기를 ‘우리들도 이를 모르는 바 아니나 관백의 명령이 이미 이처럼 되었으니, 비록 모두 죽는다 한들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조신 이 만일 나오면 바로 와서 알리겠다.’ 하고는 13일에 그의 본거지로 돌아갔습니다, 평의지(平義智) 로부터 통보된 편지 한 통은 도체찰사에게 보냈습니다.
그의 말씨로 보아 정확한 듯하니, 여러 진영에 전령(傳令)을 보내어 변란에 대비해서 검칙(檢飭)하도록 하소서. 요시라 의 말이 극히 헤아릴 수 없으므로 저들의 실정을 상세히 정탐할 요량으로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신의 부하 전사(戰士)인 송인충(宋仁忠) 을 부산 에 들여보냈고 정승헌(鄭承憲) 을 김해(金海) 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즉시 사실대로 치계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1597년 5월 18일]
1597년 5월 18일, 김응서의 장계가 조정에 당도합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니시의 심복 요시라가 와서 전하기를, '15만 대군이 전라도를 공격할 것이다. 고니시가 선봉에 서고 가토가 2군을 이끌 것이며, 전라도에서 가능한 많은 식량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살륙할 것이다' 고 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니시가 엄청난 내용을 전하자, 명, 조선측은 고니시에게 격문을 발송합니다.
평행장(平行長) 에게 보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흠차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양호(楊鎬)는 풍신행장(豐臣行長) 에게 유고(諭告)하노라. 우리 조정에서는 전에 조선 이 수길 을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고 너도 여러 차례 품게(稟揭)를 병부에 올려 순순히 따르겠다는 말을 아뢰었으므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 수길 을 일본 의 국왕으로 봉하고 너 행장 등에게도 각기 차례대로 작질(爵秩)을 내렸었다. 이러한 큰 은혜와 두터운 덕택은 바로 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는 너희 일본 과 조선 사람들을 다 우리의 적자(赤子)로 생각하여, 피차가 도륙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양측의 분을 풀고 서로가 우호하게 하고자 해서였다. 수길 이 봉함을 받은 뒤에는 이미 신자(臣子)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맹약을 깨뜨리고는 또다시 여러 왜병들을 거느리고 부산 과 기장 등 여러 곳을 점령한 다음 헛소문을 퍼뜨려 서로 공갈하니, 이 일은 크게 하늘을 거스르는 짓이다.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불길하니, 지난 가을에 너의 일본 에 지진이 있었던 것은 벌써 그러한 조짐이었다. 이는 아마도 하늘이 군주를 쫓아내고 나라를 찬탈하며 여러 섬의 무고한 대중을 살상하기를 좋아하여 더욱 흉악한 마음을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재앙을 내린 것일 것이다.
네가 만일 수길 에게 충성을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것들을 중지하도록 말하기를 ‘천조는 의리상 배반할 수 없으며 힘으로도 대적할 수 없다. 조선 은 이미 일마다 대비가 있고 일본 은 사람마다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내란을 방비하여 외침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조속히 군사를 철수하여 남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어린 아들을 위하면 천지 신명께서도 혹 보살펴 주시어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의 충성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거짓으로 청정 과 사이가 나쁜 것처럼 하나, 실상은 속으로 서로 도와 조선 을 도모하려고 밖에서 전쟁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서 가정을 버리고 어버이를 떠나게 하여 번뇌와 노고가 몇 년 동안 풀리지 않게 하고 있다. 너는 보본(報本)의 헛됨과 장옥(墻屋)의 화를 생각하지 않느냐?
너는 어찌 60여 세의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며 충성스럽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수길 과 단지 7∼8세의 젖내나는 한 아이을 진심으로 너의 군주로 생각하여, 정성을 다해 떠받들며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달게 여겨 사양하지 않느냐. 아니면 너는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환란을 두려워하고 몸을 보존해서 틈을 타 일을 성취해서 찬시(簒弑)의 역적을 토벌하고 66개 섬의 인심을 수습하여 네 산성(山城)의 옛 군주를 복위하여 다시 천하의 큰 충신이 되고 만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냐.
만일 산성군 을 바로 세울 수 없다면, 대장부가 어찌 스스로 중국 과 결탁하여 왕에 봉해짐을 취하려 하지 않고 거의 죽어가는 노추(老酋) 수길 한 사람을 받들려 하느냐. 노추가 만일 뜻을 얻게 된다면 너희들이 장차 어린 아들에게 불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반드시 너의 종족과 청정 의 집안을 멸망시켜 후일의 근심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네가 그때에는 별다른 꾀를 내려고 한들 또한 늦지 않겠느냐.
지금 조선 에서 달려와 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진노하여 남병(南兵)과 북병(北兵)이 곧바로 짓쳐 함께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유격 장군 심유경 이 너와 교분이 두텁고 또 여러 차례 말하기를, 네가 원래 나쁜 마음이 없으니 처분을 따를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본원에서는 병마를 이끌고 근경(近境)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 전진하지 않고 우선 너희들에게 순천(順天)과 역천(逆天)의 의리와 이해의 실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저 청정 으로 말하면 하나의 무식한 무인(武人)일 뿐이다. 너의 부하 중에 그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있으면 천금을 내릴 것이고, 너의 일본 의 국왕에 봉해줄 것이다. 너는 잘 도모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7년 5월 25일]
보시다시피 아직도 명과 조선측은 고니시를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가토 기요마사 라고 여긴 것이죠. 그래서 고니시에게 "가토의 목을 베어라" 라고 요구하고 있네요. 이에 대한 고니시의 반응은 너무나 교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행장(行長) 의 품첩(稟帖)은 다음과 같다.
“천조(天朝)의 유격(遊擊) 심 노야(沈老爺) 대전(臺前)에 품합니다. 듣건대 조선 병마(朝鮮兵馬) 김 방어사(金防禦使)가 산성을 쌓고 의령(宜寧) 을 사수한다고 합니다. 대개 방어사와는 4∼5년 동안 서로 정을 나누며 함께 강화에 대한 일을 논하였기 때문에 일본 국왕(日本國王)과 여러 대신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어사가 의령 을 굳게 지키며 자웅(雌雄)을 겨루려 한다고 합니다. 대저 의령 은 전라도 의 요로(要路)이므로 일본 군병들이 힘을 합쳐 성에 오르면 방어사는 반드시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전사할 것이니, 매우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노야께서는 이런 이치로 분명하게 조선 국왕 에게 말씀드려 다른 장수로 하여금 의령 을 수성하게 하고 방어사는 노야의 막하(幕下)에 함께 있으면서 장래 화목하게 할 일을 도울 수 있게 해주소서. 방어사가 절사(節死)한 후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화의를 논하게 하면 반드시 세월이 지연될 것입니다. 원컨대 노야께서는 힘써 주십시오.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대사(大事)를 성사시켜 평소의 고생을 풀어야 합니다. 오직 잘 살피십시오. 정유년 5월 26일 풍신행장(豐臣行長) 드림.”
[선조실록 1597년 6월 9일]
아주 교활하지 않습니까? 마치 조선을 걱정해주는 것처럼 써갈겼군요. 이렇게 해서 상대방이 자신을 더욱 믿도록 만든 고니시....그는 여기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도원수 권율(權慄) 의 비밀 장계가 왔다. 【그 대략은 행장(行長) 이 김응서(金應瑞) 에게 보낸 글 1통을 올려보낸 일이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 병마(朝鮮兵馬) 김 방어사(金防禦使) 족하에게 품한다. 일본 에서 평조신(平調信) 이 돌아왔기 때문에 즉시 요시라(要時羅) 를 시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 족하에게 알려주도록 했다. 또 머지 않은 앞날에 일본 군병이 바다를 건너 유둔(留屯)할 것이어서 밤낮으로 마음이 아프나,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잘 살피도록 하라. 정유년 6월 3일 풍신행장(豐臣行長) 씀.’】
[선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가 치계하기를,
(중략)
"요시라 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10월 그믐께면 연해(沿海)의 진으로 돌아올 것인데 이후에도 강화할 단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행장 의 말이나 내 말이 일을 겪고나면 징험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싸울 기약이 정해졌으니 출입하기가 곤란한 형편이다. 그러나 대병(大兵)이 바다를 건너오면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나와 알려줄 계획이며, 비록 진중에 있더라도 저들의 정상을 통고해 주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도 깊숙이 들어가고나면 병사(兵使)가 먼 경상도 에 있게 되어 통고할 길이 없게 되니, 이것이 염려된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종식시킬 방책을 강구하고 싶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백만 군사를 내보내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병기(兵器)가 훌륭히 갖춰져 있고 사졸(士卒)도 용맹스러우며 성곽도 견고하고 중국 군사가 대거 이르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짓밟아 버릴 수 있다.’ 하였더니,
답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일본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겠다고 핑계대고 다시 본토(本土)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 조선 의 수군은 이미 정돈되었는가? 지금쯤은 출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
(후략)
[선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고니시의 간교함이 구구절절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심복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가서 친절하게 자기들의 계획을 알려준뒤, "우리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라며 운을 잡고는 "수군이 출전하는 게 좋곗다"라며 수군 출전을 촉구하네요.
여기에 낚인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출전을 명하게 되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계의 달인입니다.
# by | 2009/08/21 00:17 | 트랙백 | 덧글(1)



